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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0_22011210542i3.jpg 20120110_22011210542i4.jpg 20120110_22011210542i6.jpg L20120110_22011210542i1.jpg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110.22011210542영남대로가 깨어난다 <1-1> 부산 옛길 탐사: 동래부사 왜관 행찻길(상)
일본 사신 맞으러 나선 동래부사의 뒤를 쫓아 걷다
국제신문 박창희 기자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20110.22011210542


- '동래부사접왜사도' 상세한 장면 묘사…왜관 관련 사료 가치, 웬만한 문헌 능가
- 동래읍성에서 출발, 옛 왜관영역 초입인 초량 상해거리까지 11.2㎞ 걸어서 이동
- 남문구·하마정 등 옛길 흔적 곳곳에
- 자성대·정공단·고관…역사 품은 유적 산재

    
이른 아침부터 동래읍성이 떠들썩하다. 역리(驛吏)들이 말을 끌고 나와 동헌 앞에 대기 중이고, 접대와 통교 사무를 맡은 접위관, 차비관, 훈도, 별차, 소통사 그리고 군관, 향리, 아전, 사령, 포졸, 행수, 상인, 잡색꾼, 예단지기, 기녀들까지 형형색색 옷차림으로 나왔다. 의관정제한 부사가 짐짓 의젓한 걸음으로 행렬을 둘러본다. 깃발이 앞서고 부사가 가마에 오르자 행렬이 읍성 남문을 향해 움직인다. "동래부사 납시오!" 아전이 소리를 질러 길을 연다.


동래읍성 남문은 이중문이다. 바깥쪽 누각에는 세병문(洗兵門), 안쪽 누각에는 '무우루(無憂樓)'라는 현판이 걸렸다. 임진년 왜란을 겪은 터라 근심을 없애고 싶었을 테다. 길가에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가 서 있다. 왜란으로 거의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세운 비석이다.

남문 남쪽으로 3리쯤 가자 광제교(세병교)가 나온다. 온천천에 백로들이 노닐고 햇살에 물비늘이 튄다. 부사가 초량으로 일본 사신을 맞으러 행차하는 아침이다.

■사료 가치 높은 풍속화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는 보면 볼수록 흥미롭다. 동래부사가 어떻게 일본 사신을 맞고 응대하는지 10폭 병풍에 드라마틱하게 펼쳐져 있다. 작자는 정선 또는 변박이란 주장이 있으나 논란이 따른다.

그림은 파노라마 형태다. 왼편 첫째 폭부터 일곱째 폭까지는 동래부(東萊府)에서 부산진(釜山鎭)을 지나 행사가 열리는 초량왜관으로 들어서는 행렬을 표현했다. 넷째 폭에 가마를 탄 동래부사가 보이며, 일곱째 폭의 문은 왜관의 경계를 표시한 설문(設門)이다. 여덟째 폭은 초량객사에서 일본 사신이 조선 임금의 전패(殿牌)에 예를 올리는 숙배(肅拜) 장면이고, 마지막 폭은 왜관의 연향대청(宴饗大廳)에서 일본 사신을 위해 베풀어지는 향연이다.

왜관을 이해하는데 이 한 장의 그림은 어떤 문헌보다 값지고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림과 같은 대규모 행차는 동래부에서 연간 7~10회 이뤄졌으며, 변방을 지키며 대일 외교를 수행하는 동래부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왜관은 조선시대 대일 교역창구로서, 외교·통상·사회 다방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부산포(현 범일동 일대)→절영도(영도)→두모포(동구 수정시장 부근)→초량왜관(용두산 일대)을 거치며 430여년 간 존속했으며, 1872년 일제의 전관거류지로 전환됐다.

■동래부사 따라 걷기
이제 그림을 따라 걸어볼 차례. 본지 취재팀과 영남대로 자문 전문가들은 지난 연말 행장을 차려 동래읍성 동헌에 모였다. 먼저 동래구 이정형(46) 문화재전문위원의 안내로 남문터(현 동래경찰서 뒤편 충렬로 일대)를 찾았다. 동래시장 일방통행길과 충렬로가 만나는 지점에 표지석 하나가 서 있다. "남문 자리라고 하는데, 보다시피 완전히 시가화돼 버렸어요. 복원이 필요한데 예산이 문젭니다."(이정형 위원)

동래경찰서 앞을 지나 세병교에 닿았다. 고지도에는 광제교(廣濟橋)로 나오는 다리다. 부산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사처석교비(四處石橋碑)에 따르면, 원래 나무다리였던 광제교는 1781년(정조 5년)에 돌다리로 교체됐다. 동래구 문화공보과 이상길 주무는 "사처석교비는 남문 밖에 있던 4곳의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바꾼 것을 기념해 세운 비석이라 연대가 정확하다"고 설명했다.

교대앞역으로 걸어가 동해남부선 철도를 끼고 남문구로 향한다. 법조타운 입구에 해당하는 남문구는 말 그대로 '읍성 남문의 들머리(口)'다.

거제현대아파트 앞을 지날 무렵,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양흥숙 전임연구원이 '홰바지' 이야기를 한다. "옛날 부산진시장은 4, 9일장으로 큰 시장이었는데, 동래쪽 사람들이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족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 나온 고갯마루라 하여 횃바지(횃불맞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부산교육청 입구 4거리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어 하마정(下馬亭)이라 불리는 곳. 화지산 자락에 동래 정씨 2대인 정문도 공의 묘지가 있으니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아무튼 하마비가 옛길임을 일러준다.

이어 송공삼거리다.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송상현 공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긴 어렵다'는 말이 귓전을 파고든다. 일제 때는 동래부 쪽으로 쉽게 못넘어오는 고개란 뜻으로 '모너머 고개'(일명 신좌수영 고개)란 이름도 얻었다.

■부산진성 비껴 고관으로
서면 로터리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고지도에는 서면 부근에서 부산진성(자성대)을 비껴 개운포~두모포~왜관 쪽으로 걸어간 것으로 돼 있다. 고지도 전문 연구자인 부산대 김기혁(지리교육과) 교수는 "어떤 코스를 택하든 부산진성(자성대)을 놓칠 수 없다는 점에서 서면에서 부산진시장 앞에서 자성대를 비껴 갔을 것 같다. 1872년 동래부 군현지도에도 그렇게 나온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보면, 행차 루트는 서면~광무교~부산진시장 앞→진시장로→철길(지하도)→좌천동 정공단 방향으로 갔을 개연성이 가장 높다.

증산 자락에 위치한 정공단은 조선 전기 부산진성의 남문 자리다. 임란 때 이곳에서 순절한 부산첨사 정발(鄭撥)을 비롯, 공의 막료 이정헌, 첩 애향, 충노 용월 및 무명 순절자들이 함께 배향되어 있다.

이제 왜관 권역이다. 도시철도 좌천역 2번 출구 쪽에 '영가대·부산포왜관 표지판'이 있다. 양 연구원는 "부산진성 해안 선착장에 자리했던 영가대는 조선통신사가 배를 탄 곳이었고, 부산포왜관은 1407년(태종7) 부산진시장 부근에 설치됐던 최초의 왜관이었다"며 "지형이 바뀌어 원형은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고관 입구는 두모포왜관이 있었던 곳으로, 삼거리공원에 표지판이 있다. 1607년(선조 40)에 설치된 두모포왜관은 1678년(숙종4) 초량왜관으로 임무를 넘기면서 고관(古館) 혹은 구관(舊館)이 되었다. 고관이란 지명은 여기서 유래한다.

여기서부터 초량 상해거리까지는 옛길과 근대길이 겹친다. 고관 입구에서 세일병원 뒷길을 따라 경남여중을 끼고 초량중로를 따라가면 상해거리다. 상해거리의 중심부인 중국음식점 홍성방 신관 앞이 왜관의 설문(設門) 자리다. 동행한 한정훈 부경역사연구소 사무국장은 "설문은 일본인 구역과 조선인 구역의 경계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동래부사는 여기서 한숨을 고르면서 작전숙의를 했을 것이다. 사신 접대와 협상은 이제부터다. 여기까지의 행로를 인터넷 다음 지도를 이용해 거리 측정을 해보니, 거리가 11.2㎞, 도보시간은 2시간40분이었다.


# 영남대로 종주 탐사 대장정 돌입

- 한민족 천년의 옛길을 직접 체험한다
- 초등 4학년~고교생까지 66명 참가, 동래읍성부터 서울까지 도보 이동
- 영남대로의 역사적인 의미 되새겨

    
한국청소년탐험연맹이 주최한 '영남대로 종주 탐사'에 참가한 청소년들이 지난 7일 동래읍성 북문을 지나 서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박창희 기자
지난 7일 오전 10시 부산 동래구 동래읍성 북문 앞. 앳돼 보이는 청소년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모두가 파커에 모자와 장갑, 배낭을 짊어진 완전 무장 차림이었다. 한국청소년탐험연맹 송경호(33) 팀장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영남대로의 출발지 동래읍성 북문입니다. 지금부터 걸어서 한양까지 갈 겁니다. 한양이 어딥니까? 서울이죠. 여기서 약 400㎞쯤 됩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가는 겁니다. 오늘은 양산까지 가고, 이어서 삼랑진~밀양~청도~대구~칠곡~구미~상주~문경~충주~안성~용인~성남을 거쳐 서울에 입성할 겁니다. 모두 할 수 있죠? 하는 겁니다!"

"예! 예!" 우렁찬 대답 소리가 북문 성벽을 울렸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2열 종대의 행렬이 북문을 넘어 동래문화회관 앞 도로를 향해 나아갔다.

이날 행사는 한국청소년탐험연맹이 매년 실시하는 '걸어서 가는 한양 옛길- 영남대로 종주 탐사'.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교생까지 전국에서 66명이 참가했다. 부산에서 합류했다는 김지훈(15·동래중2) 군은 "아버지가 보내서 왔으며 모험심을 키울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옛 선비들이 과거 보러 간 길을 답사한다 생각하니 가슴이 약간 떨린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이들은 지난 2일 인천 연안부두에 집결, 배편으로 제주도로 간뒤, 국토 최남단 마라도를 탐사하고 한라산 백록담을 등반한 후 지난 7일 새벽 다시 배편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송경호 팀장은 "영남대로는 우리 민족의 대동맥으로 다른 옛길이 비해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면서 "10여 차례 종주를 한 바 있어 코스를 잡고 역사현장 학습을 하는 데 별로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하루 20~30㎞씩 걷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지만, 스텝 18명이 따라 붙어 도보 지원을 하므로 낙오자가 거의 생기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이날 출발한 탐사단은 오는 19일 서울 남대문에 도착해 대장정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