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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다, 우리 딸.

by 정귀련 posted Jan 1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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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련아,
오늘은 이천사년 일월 십이일이다. 새롭게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 네가 떠난지 두번째 맞는 월요일이기도 해.
어제 패러글라이딩 했다며?
어때, 패러 새일링만큼 재미있니? 제대로 날기만 한다면 정말 새가 된 기분을 만끽할텐데.
누구나 자유롭게 새처럼 날고 싶어하는데 우리 딸 신났겠다.
냉수마찰 어땠어? - 비록 남자아이들 처럼 웃통을 벗지는 않았지만 몹시 추웠을텐데 감기에 걸리지 않았나 모르겠다. 그래도 기분은 상쾌했지? 손끝이 얼얼하도록 차가운 겨울 강가에서 머리감고 세수하고 발 씻는 거 선택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우리 딸 정말 탁월한 선택으로 겨울 방학 계획 잘 짠 것 같다.
추운 날씨 속에 찬바람과 불편한 잠자리, 먹거리, 끝없을 것 같은 고통 속에 행군하는 딸에게 이렇게 말하는 엄마-정말 지독한 계모 같다.그지? 키득키득.
전화 목소리가 너무 씩식하고 사진 속 표정이 너무 밝아보여서 우리 딸 엄마, 아빠 바람처럼 친구도 많이 사귀면서 씩씩하게 대원들과 잘 지내는 줄 알고 안심했는데, 그 동안 울고 지냈다니.......쬐끔 괘씸해. 엄마, 아빠보고 욕했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말야.
아니다. 엄마 아빠 걱정 할까봐 일부러 더 웃고 생기있는 목소리로 녹음한 거지?
그래도 여자친구는 많이 사귀었네. 이제 남은 시간 동안에는 남자친구도 사귀어 봐. 잘난체하는 건 남자애들의 타고난 특성이라고 엄마가 자주 말했잖아. 남자들은 추워도 춥지 않다고 말하고 더워도 덥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 줄 안다. 그리고 힘들어도 안 힘든 척하고 아파도 덜 아픈 척, 하늘 만큼 즐거워도 약간만 즐겁다고 해. 때로는 조금 아는 것도 많이 아는 척, 조금 힘든일을 겪었는데도 엄청 큰 일을 해낸 척하기도해. 여럿이 힘을 합쳐 해 낸일도 마치 자기 혼자서 다 한 것처럼 자랑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도(특히 여자들)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서 오직 자기만 할 수 있는 것처럼 하기도 하고 기운 없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기운센 척하기도 해. 그래서 남자들 중에는 영웅도 많고 아기도 많아.
그러니까 귀련아,그냥 지금 네가 보는 그 모습대로 친구해. 잘난척하면 잘난척하는대로 겸손하면 겸손한대로 네가 느끼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더도 말고 덜도말고 그냥 친구해.
사랑하는 우리딸,
엄마 짐작과는 달리 오늘에야 문경새재를 넘겠더구나. 우리 딸 빨리 보고픈 마음에 엄마가 자꾸만 일정을 앞당겨 생각했나봐.
어제는 가장 짧은 거리를 이동했다는게 18KM, 밤새 푹자고 오늘 새재를 넘을 모양인데 아마도 어깨는 아프고 다리는 무거워서 하룻밤 쉬었는 걸로는 새재 넘기가 꽤나 힘들거야.
경상도와 충청도를 가르는 조령이니 만큼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다.
그래도 동래를 출발해 벌써 8일을 걸었고 이제 5일 남았으니 네 말처럼 울지 말고 씩씩하게 넘으렴. 꼭대기에서 소리도 크게 질러보렴.
항상 우리 딸의 가능성을 믿고 있는 엄마가.